言寺의 풍경

어린 딸에게(박인환)

빈약한장소는없다 2010. 9. 20. 15:28
어린 딸에게

            박인환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 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 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 2004년 11월 15일
박인환의 시를 생각하면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의 낭만적(?) 시들을 생각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의 전쟁의 체험을 쓴 이 <어린 딸에게>라는 시는 박인환의 또 다른 면을 보게 한다. 박인환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그가 1960년 4.19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박인환이 4.19를 거쳤다면 김수영보다 더 이름이 남는 시인이 되고 더 많은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화 시킨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든다.
그 속에서 어린 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박인환처럼 말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1월 박인환의 시집을 다시 집어들며...